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밥 딜런/일생 (문단 편집) === 1970년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48AA3B9-7C3F-4627-8E3B-FECB03CBDAC3.png|width=100%]]}}}|| ||<#000> {{{#fff '''60년대 못지 않은 전성기.'''}}} || 1970년 5월 상순부터 뉴욕에서 녹음이 재개된다. 프로듀서 존스톤은 ‘Self Portrait’에서의 세션에서 좋은 느낌을 감지했고 새로운 앨범에서도 같은 세션을 쓴다. 새롭게 만든 곡들과 맥클리시 희곡용으로 쓴 곡들 중 몇 곡을 레코딩한다. 알 쿠퍼, 데이비드 브롬버그, 찰리 대니일스, 거기에 밥 딜런이라는 단촐한 편성이었다. 그런 시기에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이 밥 딜런을 방문한다. 밥 딜런은 해리슨이 가세한 세션도 녹음하고 앨범을 만들어가면서 앨범의 전체맥락을 집어간다.[* 단 조지가 참여한 곡은 수록되지 않았다.] 1970년 10월 21일 ‘New Moring’이라는 제목으로 앨범이 발매된다. 목소리는 다시 ‘John Wesley Harding’ 시절의 스타일로 돌아왔다. 음악은 블루스, 컨트리, 가스펠, 재즈 시 등 다양한 종류를 담아냈다. 오랜만에 밥의 시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밥의 팬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감성적이고 활기가 결여됐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으나 과거의 밥이 돌아왔다며 절찬하는 평가가 다수였다. 밥은 양쪽 모두 좋은 징조라고 받아들이며 “이 앨범이 미국을 얽매고 있는 것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며, 현 상태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라고 말한다. 판매량은 역시 호조를 보였고 UK 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다. 밥은 이때 열린 [[우드스톡]] 음악 예술 축제, 알타몬트 무료 콘서트, 그 어떤 반전 록 이벤트에도, 참가는커녕 구경도 안 간다. 자연스럽게 이 시점부터 밥을 둘러싼 미디어의 기만과 선동도 사라진다. 1970년 4월 매니저 그로스맨과의 매니지먼트 계약이 만료되고 밥은 계약을 갱신하지 않는다. 음악 출판 업무, 매니지먼트 관리는 밥 딜런의 스태프가 인계받는다. 싱글 ‘Watching the River Flow’가 발매된 지 2개월 정도 후인 1971년 8월 1일 밥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지 해리슨이 개최한 방글라데시 구제 콘서트에 출연한다. 무려 2년 만에 오르는 무대였고 인도적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자선 공연이었다. 여기에서 리언 러셀의 베이스, 조지의 기타, [[링고 스타]]의 탬버린이라는 반주와 함께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로 다섯 곡을 불렀다. 밥은 하모니카 홀더를 늘어뜨리고 데님으로 된 자켓을 입었다. 1971년 11월에는 1960년대 후반의 대표곡들과 새로운 녹음, 신곡 등을 포함한 6개의 앨범 미수록곡도 수록한 두 장 세트의 LP ‘Bob Dylan's Greatest Hits Vol. II’가 발표된다. 앨범 재킨은 방글라데시 콘서트 때의 밥의 사진이 사용된다. ‘Tommorow is a long time’도 수록되는데 이 곡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커버한 유일한 밥 딜런의 노래다. 앨범은 전작 베스트앨범과 마찬가지로 대히트한다. 같은 해 또다시 가스펠 풍의 저항 싱글을 발표한다. 캘리포니아 주 샌퀀튼 교도소에서 일어나 죄수 살해 사건을 테마로 한 ‘George Jackson’이란 곡이었다. 섣달 그믐날 더 밴드의 새해맞이 라이브에 게스트로도 출연해 파워풀한 라이브를 선보이기도 한다. 이때의 공연은 더 밴드의 ‘Rock of Ages’의 보너스 트랙으로 수록되어 있다. 1972년에는 앨런 긴즈버그의 세션에 참가하기도 하고 [[엘비스 프레슬리]]나 [[그레이트풀 데드]]의 콘서트를 보러 다니며 지낸다. 11월에는 샘 패킨파 감독의 서부극 ‘관계의 종말’에 배우로도 출연하며 음악도 본인이 맡는다. 사운드트랙도 밥 딜런이 맡게 되는데 훗날 수많은 커버송을 양산한 [[Knockin' on Heaven's Door]]이 이 영화에 나온다. 1973년 7월에는 사운드트랙 음반 ‘Pat Garrett and Billy the Kid’, 같은 해 11월 16일 ‘Self Portrait’의 아웃테이크집이라 말할 수 있는 ‘Dylan’이 발매된다. ‘Can’t Help Falling in Love’, ‘A Fool Such as I’. ‘Big Yellow Raxi’ 등 유명한 명곡, 유명한 커버를 포함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밥의 전 앨범을 통틀어 가장 혹평을 받고 있는 앨범이며 컬럼비아 레코드사와의 계약 종료 정리 작업과 관련된 발매였고 밥이 이 앨범에 대해 언급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밥 딜런은 이 앨범 이후 컬럼비아사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거부한다. 이때 신생 회사인 어사일럼 레코드사에서 더 밴드와 앨범을 만들고 전미 투어를 하면서 라이브 앨범을 내놓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한다. 어사일럼의 오너 데이비드 게펜은 더 밴드의 로버트슨과 친해진 후 밥에게 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는 유명한 프로모터 빌 그레햄도 참여한다. 밥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1974년 1월 3일부터 투어 일정이 시작됐고 이 투어는 앨범이 제작되기 전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1973년 여름부터 녹음은 계속된다. 앨범은 ‘Planet Waves’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1974년 1월 17일 발매된다. 투어중에 앨범이 발매되었는데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다. 이 앨범은 팝 컨트리 색채가 전혀 없고 밥을 듣는 사람을 고무시키는 것처럼 노래한다. 투어는 대형 스타디움 위주로 이루어졌다. 약 40일 동안 21개의 도시에서 40회의 공연을 했다. 구성은 우선 밥과 더 밴드의 무대, 이어 더 밴드의 단독 무대, 밥이 어쿠스틱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고 나서 더 밴드가 다시 등장, 마지막에는 밥과 더 밴드가 함께 막이 내릴 때까지 공연을 하는 형식이었다. 라이브 앨범은 투어 최종일인 로스앤젤레스 공연 연주를 주축으로 제작되어 ‘Before the Flood’라는 타이틀로 1974년 6월 20일 발매된다. 1965년~1966년 투어와 거의 비슷한 멤버들로 구성된 투어였지만 밥 딜런이 포크록을 시도한 후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덕분에 야유하는 관객들은 없었다. 하지만 밥 딜런은 훗날 이 투어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밥 딜런을, 내 백 밴드(the band)는 [[더 밴드]]를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투어에서 우리들이 받았던 가장 큰 칭찬은 ‘믿기 어려운 에너지다’란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우리들은 기대에 응했다. 무의미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바이오그래피, 1985년] 1966년 이후 가정이 밥 딜런의 중심이었지만 1974년에는 투어가 그의 중심으로 전환되었고 이는 곧 아내 사라와 결별하는 계기가 된다. 투어 전년도에 밥은 캘리포니아로 이사했고 광대한 토지를 구입한 후 개축에 개축을 거듭했다. 공사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경에 다다르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라와 대립하는 일만 커진다. 1974년 봄, 서로의 감각이 크게 엇갈리는데 밥이 노먼 레벤이라는 화가에게 그림을 사사한 일이 발단이 되었다. 레벤은 밥에게 그리는 것의 원리를 추상적이며 인상적으로 가르쳤다. 그의 방식은 이러했다. 밥 앞에 화병을 놓고 30초 정도 지나면 그것의 밥의 눈앞에 치운다. 그러고 화병을 그리라고 밥에게 명령하고 밥은 그리기 시작했으나 화병에 대해 무엇 하나 떠올릴 수 없었다고 한다. 밥은 2개월간 레벤에게 그림을 배웠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 사라에게 레벤한테 배운 것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사라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밥이 이야기를 해도 사라에게 통하지 않게 된다. 밥은 몇 년 후 “우리들의 결혼생활이 파탄 나기 시작했던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1978년 11월 23일, 텍사스 모닝 뉴스’]라고 그때의 심정을 밝혔다. 당시 레벤과의 교류는 밥의 창작 의욕을 되살아나게 된다. 그 결과 나온 앨범이 밥 딜런의 최고 명반 중 하나이자 대중음악 최고의 명반 중 하나인 ‘[[Blood on the Tracks]]’이다. 밥은 이 당시 이렇게 말한다. >”한 장의 그림 같은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회화처럼 일부분 만을 볼 수도 있고 전체를 볼 수도 있는 노래다. ‘Tangled Up in Blue’에서 그것을 시험해보았다. 시간의 개념과 등장인물들이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변하는 방법을 시험해본 결과, 듣는 사람에게는 3인칭 인물이 말하고 있는지, 혹은 1인칭 인물이 말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전체를 거시적으로 조망할 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1974년 8월 1일 밥은 어사일럼 레코드스와의 계약 갱신을 중지하고 다시 컬럼비아사와 레코드와 재계약한다. 그 해 여름에 밥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지내며 곡을 쓴다. 교외에 농장을 사서 농민들에게 빌려주고 오래된 가옥을 주거지로 삼아 인접한 헛간을 아트 스튜디오로 다시 만든다. 밥의 동생 데이비드가 거기로 이사를 가서 밥의 집 인근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다. 밥의 입장에서는 그곳은 후에 휴가 기간 동안 남동생 일가, 어머니, 아이들과 지내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1974년 9월 새 앨범의 녹음이 시작된다. 레벤의 영향이 밥의 가사를 보다 다각적으로 만들어주었다. 직유와 은유의 교차, 정경묘사의 시점 변화, 인물들과의 교차가 복잡다단하게 이루어지며 덩달아서 담고있는 이야기도 복잡해진다. 기존의 작품에서는 없었던 회화적인 이미지가 각각의 곡들에 떠오른다. 밥이 기존의 실생활에서 겪은 괴로움에서 영감을 받아 태어난 곡들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딜런의 영적 자서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녹음은 뉴욕에서 완료되었지만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자 12월에 미니애폴리스에 돌아올 즈음 동생 데이비드[* 미니애폴리스의 음악 프로듀서였다.]의 조력을 얻어 지방 뮤지션들을 불러 몇 곡을 다시 녹음한다. 새 앨범의 타이틀은 ‘[[Blood on the Tracks]]’, 1975년 1월 20일 발매된다. 평단의 앨범 반응은 최고조에 달했고, ‘[[Blood on the Tracks]]’는 딜런이 7년이나 9년 만에 내놓은 최고의 작품이라 불렸다. 심지어 딜런의 최고 역작이라 부르는 평론가들도 있었다. 빌리지보이스의 평론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음반에 A를 주며 “딜런의 새로운 입지는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당황스럽다. 그렇지만 가장 즉각적이고 가장 심오한 놀라움은 음악에서 온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앞선 음악가의 가장 성숙하고 확신에 찬 음반이다”라고 호평했다. 1975년 여름, 그리니치 빌리지에 장기간 체류한다. 잭 엘리엇이나 밥 뉴워스 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의 라이브에 손님으로 초대받게 된다. 그들의 무대 뒤에서 일하고 있던 믹 론슨, 롭 스토너 등과의 교류도 이때 시작된다. 연출가이자 작사가인 자크 레비도 우연히 길에서 만나 같이 곡을 만들기도 한다. 옥중에서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는 루빈 허리케인 카터에 대해 노래한 곡 ‘[[Hurricane(밥 딜런)|Hurricane]]’도 이때 탄생한다.[* 밥은 형무소로 가 카터의 지원을 약속하기도 한다.] 밥과 레비는 많은 곡들을 공동 작곡하는데 밥의 추상적 표현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내는 일을 레비는 매우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1975년 7월 레코딩이 시작된다. 20명이 넘는 세션뮤지션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중 몇 사람씩 세션을 맡아 곡을 만들어간다. 몇 번인가 그런 상황이 반복된 후 일단 세션은 해산되고 곧바로 작은 규모의 편성 세트를 결성한 후 곡이 완성되어갔다. 바이올린을 담당한 스칼렛 리베라는 바이올린을 들고 길을 걸어가다가 밥의 눈에 띄어 그에게 작업 권유를 받고 합류하게 된 세션 뮤지션이었다. 이 세션과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쌓은 교우 관계를 바탕으로 밥은 녹음과 동시에 작은 마을들을 찾아다니는 유랑공연을 시도한다. 이러한 공연의 구상은 이미 1960년대 중반 무렵 밥에게 들었다고 로비 로버트슨은 밝혔다. >”집시나 카라반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고 다양한 곳에서 자유롭게 연주하며 동시에 그것이 하나로 통일성을 가질 수 있는 투어를 하고 싶다고 밥은 말했다.” 악단의 구성으로는 롭 스토너, 스칼렛 리베라 등, 레코딩 작업의 소장파 조로 이루어진다. 밥은 잭 엘리엇, 로저 맥귄 등에게도 참여를 요청했고 1965년 헤어지고 이후 거의 만난 적이 없었던 조안 바에즈에게도 참가를 권유한다. 그렇게 참가 인원은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킹키 프리드먼, 티 본 버넷, J.스티븐 솔즈, 앨런 긴즈버그, 데이비드 맨스핀드, 여배우 로니 블레이클리까지도 유랑공연을 위한 여행 멤버에 속하게 된다. 밥 딜런은 이 투어를 영상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그것도 단순히 기록만 하는 것이 아닌 출연자, 여행 대동자들의 연기도 포함해서 말이다. 투어의 연주씬, 무대 뒤편의 모습, 여행 중의 대화,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즉흥적으로 떠오른 영감에 근거해 쓰여진 대본을 이용한 연극이 첨가된다. 두 개의 조로 나누어 촬영반을 편성하는데 각본 담당으로 샘 셰퍼드를 동행시켰다.[* 처음에 셰퍼드는 밥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밥은 셰페드에게 [[프랑스와 트뤼포]]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쏴라처럼 만들고 싶다고 전한다.] 밥이 정한 화 제목은 ‘레날드와 클라라’였고 투어명은 ‘Rolling Thunder Revue’로 정해진다.[* 밥은 특별한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정원에서 투어 명칭을 생각하다가 우연히 천둥소리가 났기 때문이라고 저렇게 이름을 정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훗날 롤링 썬더가 네이티브 아메리카의 가르침으로 ‘진심을 말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크게 기뻐한다.] 1975년 10월 30일 여행은 매사추세츠 주 프리머스에서 막을 올렸다. 공연 1회당 서너 시간이 들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예측할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가 긴장감 속에서 무대에 몰입하게 된다. 투어 일행은 밥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 즉흥 연기 장면의 촬영 때문에 종종 연기를 중단하곤 했다. 출연자는 그때그때 지명당한 사람이 밥이 지시한 장소로 끌려가 거기서 무엇을 연기하는지 지시를 받는 식이었다. ‘지시’라고는 해도 아무런 테마도 없는 경우가 많았고 단순한 잡담이나 일신상에 대한 이야기가 수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날마다 들어가는 참가자 중에는 밥의 전 여친들도 포함됐고 심지어 거기에는 전 아내 사라도 포함되었다. 사라는 영화에서 클라라 역할을 맡았고 밥은 그녀에게 쫓기는 레날드역을 연기했다. 한마디로 밥 부부 주연의 극 영화에 시샤 풍자극이 끼어들어간 구조였다. 방대한 양의 촬영분은 그 후 1년이상 밥의 감수로 편집되었고 무려 4시간분의 방대한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1978년 도시부 극장에 일주일 만에 일부 공개되었으나 일주일 만에 상영을 종료했다. 다시 2시간분량의 축소판을 만들었으나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 ‘Rolling Thunder Revue’는 1975년 12월 8일 루빈 허리케인 카터의 변호 비용 조달 자선 이벤트로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행해진 쇼를 끝으로 잠시 막을 내린다. 미 북동부, 토론토, 몬트리올을 돌아 도합 31회 공연되었다. 투어 첫 번째 시기의 라이브 음원은 2002년 부틀렉 시리즈로 발표되며 상당한 호평을 받게 된다. 1976년 1월 16일 ‘[[Desire(앨범)|Desire]]’가 발매된다. 일렉트릭 록 음반이며 가사에 서양의 전설과 현대의 의미를 결합시킨 앨범이었다. 욕망(Sesire’라는 단어는 이미 1964년부터 자주 입에 올렸다. Eleven Outlined Epitaphs에서 11번째 에피타프에서 그는 폭풍우 이후 “꾸준히 변화를 의미하는 하늘 아래서, 사신은 욕망을 환영할 거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후 돌아오는/그것은 욕망/그 밑에서 나와 함께 돌아오는/그것과 함께 돌아오는/결고 두려움 없이/마침내 믿음 가득한/그것은 나를 잘 이끌어주리/결고 실패 없이] Rolling Thunder Revue의 기점 중 하나가 되었던 1975년 7월 세션을 수록한 앨범으로 평단의 평은 호의적이었고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한다. 이 앨범은 그렇게 70년대 딜런을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가 되었다. 1976년 3월, 밥은 에릭 클랩튼의 앨범 ‘No Reason To Cry’ 제작에 참가한다. 그러고나서 8개월 후 더 밴드 해산 기념 이벤트에 참가한다. 4월 18일 Rolling Thunder Revue 투어는 다시 재개된다. 플로리다 주 레이크랜드에서 시작하여 미국 남부지역을 돌았고 5월 25일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의 공연으로 막을 내린다. 이 가운데 1976년 5월 23일 콜로라도 주 포트콜린즈에서의 무대가 NBC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다. 음원 일부는 라이브 앨범 ‘Hard Rain’으로 1976년 9월 10일 발매된다. 후기 투어에서 밥은 전기보다 더 거친 목소리로 노래했다. 1977년 3월 1일 사라가 이혼을 청구했는데 양육권, 이혼수당, 법원 감독하의 부부공동재산 분배를 원했다. 딜런의 변호사들은 특정 법률 문서들의 대중적 금지하는 판결을 얻어냈다. 사라는 판결 끝에 아이들에 대한 일시적 양육권, 말리부 자택에 대한 독점권 사용권을 얻었다. 딜런은 즉시 대규모 투어를 계약한다. 1966년 이후의 첫 월드 투어였다. 1978년 2월부터 12월에 걸쳐 도합 130회였다. 투어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1978년 2월 17일 밥은 도쿄땅을 밟는다. 2월 20일 [[무도관]] 공연을 시작으로 도쿄 8회, 오사카 3회, 도합 11회의 콘서트가 개최한다. 전설적인 뮤지션이 일본에 왔기에 일본 매스컴도 시끄러워졌고 [[NHK]]는 밥이 처음으로 일본에 온 것에 일본인의 반응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밥 딜런이 왔다’를 내보낸다. 이 당시 밥 딜런의 일본 공연은 비틀즈가 일본에 온 이후 가장 중요한 음악적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다. 무도관 공연에서 밥은 하얀 정장 차림으로 하얗게 화장을 하고 등장한다. 밴드는 밥 딜런의 생애 가장 많은 11인 편성이었다. 밥을 보조하는 형태로 음악감독을 베이스의 롭 스토너가 맡았다. Rolling Thunder Revue에 이어 기타의 스티븐 솔즈와 기타와 바이올린의 데이비드 맨스필드가 가세했고 유럽 투어 중이었던 기타의 빌리 크로스가 롭 스토너에 의해 호출됐다. 드럼에는 [[킹 크림슨]]의 초기 멤버였던 이안 왈리스, 퍼커션에 [[모타운]]의 바비 홀, 색소폰의 스티브 더글라스, 토니 윌리엄스, 알란 파스쿠아, 코러스에는 헬레나 스피링스, 조 앤 해리스, 데비 다이같은 쟁쟁한 뮤지션들이 가세했다. 일본의 밥 딜런 음반 배급원인 소니뮤직의 제안으로 밥은 2월 28일과 3월 1일의 일본 무도관 공연을 라이브 리코딩하여 LP 2매 1세트로 발매한다. 일본 공연은 2부 구성으로 도합 28곡, 그것들 중 거의 연주 순으로 22곡이 뽑혀 앨범에 수록되었다. 앨범 타이틀은 ‘BOODOKAN’, 1978년 8월 21일 일본에서 발매된다. 하지만 곧바로 해외에서 주문이 쇄도, 일본에서 오는 수출판의 고액 거래를 대비하여 컬럼비아 레코드사는 다음 해 1979년 4월 전세계를 대상으로 이 앨범을 발매했다. 밥의 생애 첫 단독 라이브 음반이었다. 투어는 일본에서 뉴질랜드, 호주를 돌아 일단 미국으로 돌아온다. 투어 도중 롭 스토너가 밴드 내의 알력다툼 때문에 해고되었고 이 빈 자리를 엘비스 프레슬리의 밴드에서 활동했었던 제리 셰프가 채워준다. 코러스의 데비 다이도 투어 도중에 빠진다. 대신해서 참가한 사람이 바로 미래의 아내가 되는 캐롤린 데니스였다. 참가 의뢰를 받았을 때 캐롤린 데니스는 밥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한다. 투어 재개는 1979년 6월 이루어졌다. 밥은 이 기간 동안 신작 앨범의 녹음을 감행한다. 프로듀서는 밥 존스톤을 예정했으나 스케줄이 맞지 않아 엔지니어 돈 드비토가 대신 맡게된다. 신곡은 전에 이미 작곡이 끝난 상태였다. 녹음장소는 밥이 리허설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구가옥을 개조하여 만든 산타모니카의 런다운 스튜디오로 정해진다. 음향상태는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연주에서 얻게되는 강한 결속감을 통해 다른 앨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자적인 사운드가 나오게 된다. 일각에서는 스티브 더글라스의 색소폰이 사운드의 핵이 되고 있었으며 곡조에 공통된 것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브루스 스프링스틴]]과의 비슷함을 지적했으나 밥 딜런은 “50세 이하 녀석들은 흉내 내거나 하지 않는다”라며 반박했다. 앨범은 사랑에 대한 고뇌와 초조를 노래했고 종교적인 특히 성경에서 영감을 얻은 곡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밥 딜런은 앨범의 완성도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앨범 제목은 “Street-Legal”, 1978년 6월 15일 발매된다. 평단의 반응은 찬반으로 갈려서 매우 미묘했으나 시간이 지난 현재는 재평가되어 딜런의 수작 앨범 중 하나로 남게 된다. 미국에서는 11위, 영국에서는 1위를 기록한다. 1978년 투어는 유럽에서 돌아와 미국 각지를 돈 후 12월 16일, 마이애미에서 종료된다. 투어 도중 밥은 코러스 중 한 사람인 헬레나 스프링스와 깊은 관계를 맺으며 두 사람은 곡을 함께 만들기에 이른다. 그동안 함께 만든 곡은 10여 곡에 이르며 그중 두 곡을 [[에릭 클랩튼]]이 사용한다.[* 앨범 'Backless'에 수록.] 이 시기 헬레나 이외에도 여러 명의 흑인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었다. 이 당시 밥은 흑인 문화에 심취해있었으며 투어 도중 공연 후 식사로 소울 푸드를 제공받기도 했고, 일상생활을 보낼 때도 흑인 음악을 들었다. 흑인적인 것을 다각적으로 탐구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 당시 밥은 이혼 후 자녀들을 만날 수가 없어서 여러 명의 여자친구를 사귀며 위로를 얻게되는데 그녀들의 영향으로 밥 딜런은 [[가스펠]], 거기서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까지 관심의 폭을 넓히게된다. “Street-Legal”의 수록곡 ‘Señor’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에서 태어난 곡이다. 헬레나 스프링스에 의하면 밥은 당초 기도 방식조차 모른 비신자였지만 설명을 하자 기독교 탐구를 시작한다. 다른 여자친구였던 메리 앨리스 아티스는 소규모 복음교회 빈야드 펠로우쉽의 목사를 소개해 준다. 그때 딜런은 목사에게 자신의 인생은 공허하다고 말한다. 밥은 같은 교단의 신도 학급에 들어가 1979년 전반에 걸쳐 3개월간 성경을 배운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세례를 받고 이른바 Born Again(신생)파 교도가 된다. 밥 딜런의 친척들 중에는 이 선택을 화를 냈고 유대교도로 성장한 밥의 자녀들도 동요하게 된다. 하지만 훗날 밥은 당시 'Born Again'이라는 단어는 사용한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밥은 그때의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곡들은 만든다. 당초에 밥이 프로듀서가 되어 그 신곡들을 캐롤린 데니스가 노래하는 앨범으로 만들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결국 밥 딜런 본인이 직접 부르는 ‘Slow Train Coming’이 1979년 8월 20일 발표된다. 녹음은 앨라배마 주에 있는 머슬 숄스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다. 프로듀서는 거장 제리 웩슬러와 베리 베케트가 담당한다.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마크 노플러, 픽 위더즈, 팀 드럼몬드, 머슬 숄스 혼스의 호른 세션에 여성 코러스 세 사람이 포진한다. 앨범은 듣는 이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밥의 노래에는 윤기가 다시 살아났고 델라니&보니나 리언 러셀 등의 수많은 가스펠 록 명작들과 비견되는 동시에 진지한 표현력이 살아있는 노래와 비트가 깊게 결합됐다. 앨범은 평단의 평은 갈렸으나 로버트 크리스트가우가 B+를 주며 전작보다 좋은 평을 얻었으며 이 앨범을 혹평한 사람들 대부분은 앨범의 퀄리티가 아닌 딜런의 기독교 회귀에 대한 반감에 의해 혹평했다. 이런 논란이 사그라든 현시점에서는 상당한 수작으로 평가받는 앨범이다. 상업적으로 3위에 오르며 역시 이전 작품보다 좋은 성과를 얻으며 대성공을 거둔다 밥 딜런은 ‘Gotta Serve Somebody(누군가를 섬겨야만 해)’를 싱글컷했고 결과는 빌보드 차트 24위로 ‘Knockin' on Heaven's Door’ 이후 최고의 성과였다. 드럼에 짐 켈트너, 프레드 태키트, 오르간에 스프너 올드햄, 피아노에 테리 영, 그리고 리코딩 멤버인 팀 드럼몬드와 여성 코러스 세명이 포진한 멤버를 이끌고 1979년 11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전미 투어를 나선다. 이때 기존의 작품은 한 곡도 안 불렀다. 여성들이 노래하는 가스펠로 시작하고 밥이 등장해 직접 만든 가스펠을 불렀다. 객석은 당연히 대혼란이었다. 야유와 박수갈채가 뒤섞였지만 밥 딜런은 미동도 안 했다. 밥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많은 미디어들이 오랜만에 밥 딜런을 이때 까기 시작했고 기독교도들 중에서 밥 딜런의 신앙 자체는 진심인지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고 유대인 사회에서는 경원시되었다. 록매니아들에게는 비아냥을 받았다. 이 무렵 밥이 적으로 돌린 자들은 자신이 일렉트릭 기타를 잡았던 그때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 하지만 밥 딜런은 1980년 2월 27일 ‘Gotta Serve Somebody’로 그래미상 최우수 남성 록 보컬 퍼포먼스를 수상한다. 이때 ‘Gotta Serve Somebody’를 가사를 바꿔 부르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